◉ 11.18(토)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 욥기 13장 20절-14장 22절
< 절망과 소망 사이에서 >
욥은 두 가지 소원을 아뢰며,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말미암은 고통에 절망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바라며 그 고난의 때가 지나가기를 소망한다.
1. 고통의 절망과 그 고통이 지나기를 바라는 소망 사이에서(13:20-14:22)
욥은 하나님께 두 가지 소원을 말한다. 첫 번째는 징벌하시는 손을 자신에게서 거두어주셔서 더 이상 두렵게 하지 마시기를 구한다(21). 두 번째는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아뢴다(22-28). 고난의 이유를 알면 견딜 목적과 힘이 생긴다. 욥은 자신의 죄 때문이라면 어떤 죄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이유를 알려주시지 않은 채 고난을 계속 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절망한다(14:1-6; 18-22).
여기서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도록 기다리셨다가 징계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확신해야 한다(23-28). 이 고난은 어쨌든 하나님이 용인하신 것이고, 우리는 이 고난으로 인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차적인 뜻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토로하고 탄식하고 절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우리 토로와 탄식과 절규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은 왜 이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그 까닭은 모른다.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욥이 하나님께 아뢴 두 가지 소원처럼, 고통이 너무 심하니 좀 적당히 해주시면 아니 되겠냐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이고, 그 까닭을 알려달라고 기도하며 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약 5:13a)
없었으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이 시간은 하나님을 더 깊이 풍성히 알아가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우리는 이 과정을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 가운데 던진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 시간은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가운데 더욱 머무는 때가 아닐까? 그래서일까? 욥은 죽음과 같은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겠다고 고백한다(7-15). 아주 희미하지만, 부활의 신앙을 볼 수 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욥 14:14-15)
욥은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기다리며 모든 고난과 심지어 죽음도 견디어 보겠다고 말한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심히 괴로워 절망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허락하셨다. 모든 눈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다(계 21:4). 그러므로 고난받을 때는 기도하고, 부활의 약속과 소망으로 현재의 고난을 이겨나가도록 하자.
하나님 아버지!
극심한 고통으로 절망이 덮칠 때,
이때는 더욱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절망 가운데서
여전히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크게 체험하게 하옵소서.
죽음 같은 고통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고통을 이겨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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